교회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곳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실 뿐 아니라(사 55:8-9) 세상은 에덴 상실 이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곳이 때문이다. 세상의 눈으로 보거나 세상의 방법을 따라간다면 교회의 존립 의미는 이미 상실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그 동안 한국교회는 세상의 형식과 논리로 교회의 모든 일들에 그대로 적용해온 감이 없지 않다. 교회성장론이나 목회성공, 교인배가운동 등은 그리 낯설지 않은 용어들이다. 일부 반성이 있기는 하나 교회연합적인 행사에 있어서도 피상적, 형식적, 과소비 행사는 일반화되어 있다. 교회연합적인 행사 전후에는 으레 화려한 호텔에서의 기도모임이 있어왔고 대형집회 등에는 관련도 없는 고문, 자문위원, 실행위원, 명예위원 등의 명단이 교계신문을 어지럽게(?) 장식되곤 한다. 이들 단골 명사가 빠지면 행사 자체 유지가 어려울 지경이 되어버렸다. 교계 주도의 행사나 지도급 인사들에게서 이와 같은 형식의 과소비가 난무하는 한 성도들에게서 그 이상의 절제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타종교인들이나 이단 집단들이 갖는 과소비 집회와 과연 무엇이 다르다고 할 만한 점이 있을까. 전혀 차별화가 눈에 띠지 않는다. 이런 형식적 광고가 기독언론에서 사라지는 날은 언제일까?
혹 이런 행사 자체를 귀중한 옥합을 주님께 드리는 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한 번의 대형 집회를 위해 쓰는 수 억 또는 수십 억의 예산은 모두 성도들의 작은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드리는 물질과 희생이 아니라면 오히려 남의 옥합을 가져다 복음과 무관한 일에 쏟아버리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명예만 자기가 취하는 탐욕의 행위가 될 것이다. 연합모임에서의 절제된 지혜가 아쉽다.
이제 갑작스런 IMF 위기는 교회에도 여러 반성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환경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최소한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너무 거창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환경학자들이나 고민할 주제로 여긴다. 신학을 공부하기 전 필자는 환경을 공부하였지만 사실 환경문제는 지극히 작은 일로부터 출발한다.
롯데월드가 사용하는 전력량은 제주도 전체가 소비하는 전력의 절반에 해당한다. 63빌딩이 소비하는 전력량은 의정부시 전체가 사용하는 전력과 맞먹는다. 대형 호텔에서의 기도모임이 최소한 쑥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교계의 분위기는 과연 불가능한 기대일까.
일본 여행시 그곳 대중 목욕탕을 다녀본 적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일회용 제품을 사용하는 데는 한 곳도 본 적이 없었다. 만일 우리 국민이 일회용 칫솔이나, 치약, 면도기 샴푸 중 200원 짜리 제품 한 개를 1주일마다 평균 1개씩만 사용해도 우리는 대중 목욕탕 문화에서만 일본인보다 3억 달러의 낭비 요소가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더욱이 해마다 10조원 이상이 쓰레기로 달아나는 음식 문화나 고급차량 선호의 우리 교통문화 등 그 밖의 낭비 요소도 우리는 일본의 그것보다 훨씬 더하다. 모든 산업에서 일본 의존도가 큰 우리들이 그들보다 덜 소비지향적이라고 내세울만한 부분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것같다. 한국의 언론을 주도하는 지식인이나 일본 특파원들은 "일본은 없다"고 외치면서 그들의 부정적인 것을 들추어 심리적 위안을 느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우리들이 배울 필요가 있는 평균적 일본인들의 절제된 삶에 대해서도 좀더 솔직하게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최소한 취재한답시고 호텔 목욕만 즐기지 말고 밑바닥 대중탕에도 다니면서 말이다.
이러고도 전 인구의 30%가 기독교인이라고 자랑하면서 그들의 잡신 문화를 욕할 자격이 있는지 우려된다. 커다란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명쾌한 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솔로몬에게 허락한 하나님의 성전 규모는 길이가 61규빗이요 폭이 20규빗에 불과하였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지구상의 모든 거식하는 생물을 방주에 싣기 위하여 120년 동안이나 겨우 길이 300규빗, 폭 50규빗, 높이 30규빗의 방주를 건조하였다. 성전이나 방주나 역사적 기념물치고는 그다지 거창해 보이지 않는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역사상 가장 찬란한 보화와 지혜를 소유하였다던 솔로몬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성전 크기가 아무리 확장해 보아도 겨우 30m길이 밖에 되지 않도록 하였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오히려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내고(창 11:4)"자 한 바벨탑의 세상 문화와 크게 대비된다. 바벨탑처럼 거창한 건조물은 서민들의 물질과 노동의 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전혀 취하지 않으셨다!
큰 교회당을 짓고 유명해지거나 무슨 커다란 선교를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과는 별 관계가 없는 듯하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일들로만 우리와 회개하신 것이다.
최초의 집사 스데반을 참으로 비극적 방법으로 순교케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큰 자를 의미하던 사울을 바울(작은자)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복음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진리라는 것을 곧잘 잊고 산다.
이제 기독인의 환경인식도 달라져야 한다. 대형 교회에서 폐품을 재할용하고 분리 수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보다 달라야 한다. 지극히 작은 일로부터 달라져야 한다. 주일에 자가용을 타고 와서 교통정리 봉사를 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자가용보다 대중교통 수단이나 봉고들을 이용한다면 이런 불필요한 봉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큰 교회들이 교회 버스나 정도를 줄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3만5천 교회 중 1천 교회가 대형버스 하나를 줄이면 연간 1억 달러 이상이 절약될 것이다. 최소한 한두 명이 타고 오는 자가용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적어도 교회만큼은 있어야 한다. 만일 모든 성도들이 자가용을 소유하여 타고 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되도록 가까운 작은 교회 가기 운동도 일어나야 한다. 어린 자녀들이 있는 성도들이나 신앙의 홀로서기가 가능한 성도들은 굳이 인기 있는(?) 설교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러면 대형 교회 건물에 대한 필요도 많이 줄어들 것이다.
자전거의 활동도 좋을 것이다. 필자는 수년 전 3년여간 한강변을 따라 자전거 통근을 한 적이 있는데 전혀 불편을 느껴보지 못했다. 오히려 퇴근길의 한강변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교제하기에 너무도 넉넉하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어린 자녀들을 동반하고 교회에 가는데 자전거만큼 편리한 수단도 없다. 독일, 일본, 덴마크, 네덜란드 등 선진국일수록 자전거 이용율이 높다는데 대해서는 우리는 너무나 무관심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것들과 가까워져야 한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작고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고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다"(사 53:2)고 하였다.
인류와 세상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에 줄기차게 집착하여 왔다. 비록 이것이 죄악은 아니지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로 끊임없이 죄악의 씨앗이 되어 왔다. 인류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서 눈을 떼지 않는 한 죄악의 문제와 더불어 환경의 문제도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는 외쳐야 한다. 환경의 피해는 작은 생명과 작은 자들로부터 시작된다. 가난한 이웃은 일차적 피해자다. 실제로 환경에 있어서 절제의 요구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한 자들과 국가와 기업의 몫이다. 즉, 오염의 큰 주체는 집단적이고 경제적이며 고도로 조직화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작은 논리지만 오염의 주체들과 맞서야 한다. 방사능, 골프장 문제, 소각처리, 산업쓰레기, 재사용 기술, 대기오염, 폐기물의 재활용 등 환경의 어려운 문제에 있어 작은 것들을 보호하고 지키는 편에서 대체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가깝게 다가서는 일이다.
지난 30년간 국내 종이 소비량은 130배 증가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마구 쓰면 주님이 오신 날이 그만큼 가까워지지 않느냐고 농담 아닌 농담으로 반문한다. 에너지가 고갈되면 주님이 오시는 날이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소비로 말미암아 우리 다음의 후손들이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작은 분량으로 고통을 참아야 할 것이다. 결국 기독인의 환경운동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눅 16:10)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작은 자들과 함께 하고 작은 것들을 사랑하는 섬김과 봉사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환경보존 운동은 기독교인의 개혁운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우리는 이런 문제에 얼마나 무심했던가! 혹시 교회의 과소비가 외환위기에 일조하지는 않았는가? IMF를 맞아 이제는 교회가 기독인들이 환경 윤리에도 조금은 눈을 돌리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