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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 과학
자연과학(이하 과학)은 학문적으로 보면 대중들이 그다지 관심을 두거나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하는 분야가 아니다. 그럼에도 과학에 관한 관심은 꾸준히 늘어왔다. 싫든 좋든 과학이 우리들 인류생활 가운데 조금씩 그 영역을 넓혀 왔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더욱 과학에 눈을 돌리게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것은 최근 잇따른 새로운 과학적 성과들이 사람들에게 감탄과 당혹감을 함께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적 성과들은 과학의 전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첨단 멀티미디어와 생명공학, 생명의학 등이 주도하면서 빠르게 사람들의 의식을 뒤흔들고 있다.

더욱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일구어 놓은 이런 첨단 과학과 테크노피아에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과학적 성과들의 파급에 따른 사회적, 윤리적, 도덕적, 환경적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많은 분야에서 예측이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불안 심리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서 ‘과학’ 또는 ‘과학적’이라는 말들은 현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사람들을 놀라게 만드는 충격적인 과학 성과들이 언론을 통해 쏟아지면서 과학이야말로 인류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늘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현대인들은 과학자의 한 마디에 굉장한 권위와 무게를 부여하려고 한다. 마치 과학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숭배의 대상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제 과학과 관련된 모든 이슈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도 그저 외면만 하고 있을 영역은 결코 아니게 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처 자체가 너무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현 문제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며 대처해야 될 것인가? 어디서부터 접근을 하고 풀어 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그것은 물론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 문제를 다루는 데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본적인 인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먼저 모든 학문이 그러하듯 과학도 한계를 가진 학문임을 명심해야 한다. 과학은 우주가 왜 존재하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 태어났는가 등의 근원적 질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또 과학 자체는 도덕적 문제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못한다. 과학은 자로 재고 저울로 무게를 달며 수치로 나타내는 것은 가능하지만 사랑의 무게를 달아보거나 사상(思想)의 깊이를 재는 등 물리적으로 잴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과학도 어떤 부분에서는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다. 이러한 한계를 잘 알았기에 위대한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종교가 없는 과학은 소경이요 과학이 없는 종교는 절름발이이다.” 라고 종교와 과학이 조화와 보완의 관계에 있음을 고백하고 있다.

둘째, 과학 기술문명의 발전 속도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더욱 가속도가 붙어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다. 오늘날 살아있는 모든 과학자의 숫자는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과학자의 숫자보다도 훨씬 더 많다고 한다. 과학문명의 발전 속도는 이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는 인류의 통제권에서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이런 시기가 올 것임을 예측하고 있다(단 12:4).

셋째, 이렇게 인류의 통제를 벗어나 발전하는 과학 문명은 어떤 식으로든 인류에게 전에는 없던 새로운 골칫거리들을 남겨놓고 있다. 자동차와 컴퓨터 등으로 인류는 이제 분주한 시간의 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현대인들은 더욱 시간에 쫓기고만 있다. 또한 과학기술이 만들어내는 여러 부가가치 앞에 오히려 자신과 가족들의 경제적 욕구를 실현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람들을 압박하고 있다. 과학의 성과가 오히려 실직을 양산하고 가족의 파산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충돌 앞에 일부는 불편했던 과거의 삶을 그리워하는 정서적 회귀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아무튼 과학 기술 사회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부산물 앞에 지구촌의 모든 것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감은 더욱 점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간의 행동 방식이나 생활패턴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의식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다. 생명 의학과 유전 공학의 발달은 질병의 조기 치료를 넘어 인위적인 생명의 조작에까지 조심스럽게 손을 대고 있고, 전자공학의 발달은 멀티미디어를 통해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앉아서 탐험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사람들은 마치 이제 머지 않아 과학이 인간의 생명도 통제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고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공상을 넘어 이것을 신념으로까지 굳혀가고 있다. 과학기술을 맹신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숨가쁘게 돌아가는 과학의 성과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 대응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런 과학적 성과들의 기독교적 의미는 어떤 것일까?

과학 지상주의는 위험하다. 우리는 인류가 과학지식과 이성으로 풀 수 없는 플러스 알파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사람의 감정이나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흘린 눈물에 대하여 생화확적 작용으로 설명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일반 대중들은 언론이 제공하는 장미빛 환상으로 과학을 내다보려고 한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가 마치 곧 풀릴 것이라는 착각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사실 인류는 우주의 신비는커녕 아직 한 개의 생체 단백질도 합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 세상의 각 생물은 각각의 고유한 단백질의 종류를 지니고 있다. 때로는 유사하면서도 기능이 다른 천문학적인 숫자의 단백질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사람만 하여도 10만 가지가 넘는 단백질의 종류가 체내에 존재하면서 유기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그러나 진화론자들이 원시 생명체라고 주장하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대장균 한 마리는 체내에서 2,800가지나 되는 단백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내면서 생명을 유지한다.

이 시대와 사회의 문제는 비단 정치가들과 경제인들만의 짐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제는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책임이 주어지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 책임의 일단은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허한 고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과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책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를 읽는다”고 한 위대한 과학자 뉴턴과 케플러의 솔직한 고백이 이 시대에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귀를 기울이는 자세야말로 오늘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기독교인이 지녀야 할 덕목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최근에 알려진 과학의 구체적 이슈에 대한 기독교적 탐색과 성경적 접근을 해보고자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묽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묽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마 16:2,3)라고 하신 말씀처럼 시대를 분별하는 기독인이 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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